WORKS
미술평론가 Art Critic [1]
Constellation of Fossils, or Mourning (In) the (In)Human Future
Solo Exhibition "Scenario" at Shower
Exhibition site and Online only
하지만 이러한 설명들은 ‘생명’ 그 자체의 증거를 제시하진 못한다. 죽은 사람의 뇌와 심장을 아무리 해부해봐도 ‘의식’과 ‘영혼’의 존재를 규명할 수 없다는 존재론적 아포리아의 연장선에서, 이는 대체 ‘생명이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이 질문을 “작업 세계의 근본적 질문”이라 규정하면서, 작가는 이에 대한 자신의 오랜 관심이 “노화로 인한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인간”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한 것이라 고백한 바 있다. 특히 “가설과 추정을 바탕으로 생명의 시나리오를 써가는 생물학에 매력을 느껴, 이를 작업에 가져와 조각을 통해 가상의 표본이자 화석을 만들며 생명에 대한...생각과 상상을 덧붙이게 되었”다고 그는 자신의 작업을 소개한다.
죽음만큼 자명해 보이지만, 이런 의미에서 생명에 대한 탐색은 그 기원에 대한 가설과 추정에 오랜 세월 매달려 왔다. 최초의 인간으로 언급되는‘아담의 배꼽’과 탯줄을 둘러싼 신학적 논쟁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가령 ‘인체’에 한정하긴 했지만 18세기 프랑스의 의사였던 바르테즈(Paul-Joseph Barthez, 1734-1806)는 “모든 생명현상을 만들어내는 원인”을 “생명원리(principe vitale)”라 불렀고, 프랑스의 저명한 해부학자이자 병리학자였던 비샤(Marie-François-Xavier Bichat, 1771–1802)는 “생명력(force vitale)”을 언급했다. 이를 스위스의 신경생리학자인 콘스탄틴 폰 모나코프(Constantin von Monakow, 1853-1930)는 “호르메(hormé)”라 칭했으며, 독일의 생물학자인 한스 드리슈(Hans Driesch, 1867-1941)는 “엔텔레키(entelelchie)”란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3] 생기론(vitalism)의 전통은 이렇게 자신이 상정하는 생명의 모호한 본질을 언제나 낯선 고대 그리스어에서 가져온다고 꼬집으면서, 조르주 캉길렘은 오히려 “생명의 고유성을 인정한다면 물질을 생명 안에 포함시키고, 과학일 따름인 물질에 대한 과학을 생명체의 활동에 포함시켜서 이해해야 한다”고 일찍이 지적했다. [4]
2. 이는 생명을 비물질적인 것으로 전제하고, 물질은 생명이 부재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이분법적 사유의 공고한 전통을 근원적으로 문제시하는데, 손희민은 이러한 철학적 성찰의 계보를 ‘화석’을 매개로 감각적으로 천착해온 대표적인 젊은 작가다. “생물의 기원과 진화를 추정하는 단서이자 시공간이 뒤섞인 '생물의 조각'”이라는 그의 화석에 대한 규정은 그것이 “미래나 과거 생물에 관한 상상과 진화의 감각을 드러내는 매개”라는 인식을 통해서도 보완된다.
물론 그의 작업을 처음 접하거나, 별다른 정보 없이 전시장을 찾은 관객들에게 이러한 말들은 지나치게 추상적으로 들릴 것이다. 이러한 인상은 “마치 갓 발견된 신종의 화석처럼, 변이하며 진화하고 있지만, 그 단편은 볼 수 없는 생물처럼, 제 작업이 미래의 단서이자 화석처럼 남길”바란다는 그의 고백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대체 그는 왜 하필 살아있는 것이 아닌 ‘화석’을 다루는 것일까? 대개 ‘과거’의 지표로 간주되는 화석을 “미래의 단서”로 본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이 지점에서 작년 여름 그의 개인전(<HMS Challenger>, 2023.7.1.-23)은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서울의 ‘보안여관' 지하에서 열린 이 전시는 같은 시기 바로 위층에서 열렸던 ‘언메이크랩(Unmake Lab)’의 전시와 특히 흥미로운 대조를 이뤘다. “비미래(Nonfutures)”라는 표제 아래 AI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후자의 영상과 설치물들은 눈이 세 개인 사슴처럼 컴퓨터가 그로테스크한 방식으로 만들어낸- 여전히 종종 ‘기형적(monstrous)’이라 불리곤 하는- 동물들의 ‘비정형적(informe)’인 오디오비주얼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전경화했다. 이는 인공지능과 예측알고리즘을 활용해 0.04초의 시차 속에 도래할 꽃과 나무의 이미지를 구현했던 히토 슈타이얼의 <파워 플랜츠(Power Plants)>(2019)와 같은 작업을 동물계에 적용해 보다 급진적으로 변주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에 비해 손희민의 전시장은 이러한 동식물의 도상과 거리가 멀었다. 화석으로 추정되는 반투명 조각들이 자연사 박물관의 작은 전시실을 떠올려주는 어두운 조명 속에 고요히 도열해 있었을 뿐이다. 작가에 설명에 따르면 이들은 ‘보이지 않는 생물'로 “크기가 너무 작아 인간의 눈으로 보기 힘든 미소 생물이나, 멸종해버려서 볼 수 없는 고대 생물을 조각적 복원과 재현의 감각을 통해 가상의 표본이나 화석으로 만든 시리즈”였다. 여기에 그는 "생물 조각”이란 이름을 붙였지만, 이 표현을 듣자마자 곧바로 ‘화석’을 떠올릴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이는 앞에서 환기한 것처럼 ‘생명의 형식’과 ‘죽음의 형식’이라는 모순적 아포리아를 재소환한다.
3. 이번 전시 역시 고요하건 마찬가지였지만 차이들이 있다. 첫 번째는 명암의 대조로, 어둠을 바탕으로 빛이 파고든 보안여관 전시에 비해 이번 전시는 말 그대로 ‘화이트 큐브’에서 벌어진다. 물론 전시장 바닥에 노출된 부분적인 흔적들은 한때 미술계를 휩쓸고 간 ‘폐허(ruin)’의 공간을 환기시키지만, 전반적인 인상은 대척점에 가깝다. 이러한 차이는 그가 이번 전시를 "미래 화석”이라 이름 붙였다는 또 다른 사실을 통해서도 강화된다. 전자를 “생물학자와 고생물학자의 자료 바탕에서 생물의 구체적 형상을 연구실이나 박물관의 감각으로 선보인 수렴적 시리즈”로 규정하면서, 작가는 이를 “생물 진화에서 특정 기관이 등장하게 된 이야기를 '화석' 이라는 매개와 뒤섞임의 감각으로 나타내고자 하는 발산적 시리즈”라 기술한다.
하지만 ‘명과 암’, ‘수렴과 발산’이라는 차이는 여전히 고요함의 정동에 지배 하에 놓이는 게 사실이다. 공교롭게도 내가 방문했던 시간 전시장의 관객은 나 혼자였는데, 이는 해당 공간에 배치된 ‘화석’들이 말 그대로 ‘죽은’ 것이라는 인상을 더욱 강화해줬다. 문제의 대상이 석고나 브론즈로 만들어진 관습적인 ‘조각’들이었다면 터무니없는 환기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물론 동시대 미술에 관심을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진 관객이라면, 그의 작업은 고요하기는커녕 흡사 정글처럼 소란스런 동시대적 참조의 네트워크 속에 놓인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도상적인 차원에서 누군가는 영화 <에일리언(Alien)>(1979)의 괴물 형상 디자인으로 잘 알려진 H. R. 기거(Giger)를 떠올릴지 모르고, 누군가는 영국 테이트 모던에서 전시 중인 이미래의 ‘캐리어즈(carriers)’시리즈를 떠올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5] 실지로 이들을 떠올리는 지인들도 없지 않았는데, 손희민의 화석들은 기거의 작업이 변주하는 사지(四肢)를 가진 유기체 형상에서 유지하는 거리와 이미래의 작업이 최소공배수로 환기하는 습기와 운동성의 차원이 철저히 제거된다는 두 가지 지점을 통해 선명하게 구분된다.
이들보다 적절한 비교 대상은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지난 9월 리움미술관에서 오픈해 커다란 관심 속에 지속 중인 아니카 이(Anicka Yi)의 전시 <또 다른 진화가 있다, 그러나 이에는>[6]가 그것이다. “인공물과 기술, 기계를 생명진화의 연장선에서 바라보는” 손희민의 <Scenario>와 다르지 않게, 아니카 이의 이번 전시 역시 ‘생명’과 ‘형식’, ‘자연적인 것’과 ‘인공적인 것’의 뒤섞임과 공진화를 오랜 세월 파고 들어온 그의 잘 알려진 특성을 다종다기한 작업을 통해 화려하게 펼쳐 보인다. 무엇보다 이의 작업은 국내 예술 및 인문학계 전반에 ‘신유물론(New Materialism)’의 유행을 불러온 미국의 정치철학자 제인 베넷(Jane Bennett)의 대표작인 『생동하는 물질 Vibrant Matter』을 글자 그대로 육화한 것 같은 인상을 준다.[7] AI로 렌더링한 세포들은 살아 움직이는 듯 생생하고, 일반인들에게는 해파리를 연상시키던 형체는 가까이 다가가 보면 미세한 톱니로 이뤄진 기계로 밝혀지는 식이다. 혹자는 후자에서 김윤철 작가의 작업들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덴푸라 꽃튀김’을 활용해 만든 독특한 악취로 많은 화제를 모은 <절단>(2024)과 같은 신작이 웅변하듯 아니카 이는 생물학적 ‘부패’라는 특성을 강조함으로써 전자가 주목하는 기계적인 벡터를 미세하게 탈선시킨다. 유기체와 비유기체의 경계가 뒤섞이는 과정에서 전경화되는 이러한 ‘생동감’은 손희민의 전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특성이다. 그것은 매우 자의식적인 방식으로, 거의 굉음에 가까운 침묵으로 자신의 부재를 알린다.
하지만 손희민의 이질성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이의 작업은 <전류를 발생시키는 석영 Galvanic Quartz>(2023–2024)이란 작품이다. 리움 전시의 대표작으로 인스타에서 부유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 작품은 ‘방산충류(Radiolaria)’ 시리즈로, 대략 5-6억 년 전 캄브리아기에 처음 등장한 단세포 동물성 플랑크톤인 방산충류에서 영감을 얻은 작업이다. “원생생물 또는 단세포 생물로 식물도, 동물도, 곰팡이도 아니”지만 “지구의 탄소-산소 순환에 필수적인”[8] 이 존재를 아니카 이는 “생물학화된 기계(biologized machines)”나 “친족으로서의 기계(machines as kin)”로 개념화한다. 그것은 “테크놀로지를 자연 세계의 연장(technology as an extension of natural world)”으로 간주하고, 자신의 작업은 “자연으로의 회귀(return to nature)”가 아니며 “우리가 결코 진정으로 자연을 떠난 적이 없다는 인식(a recognition that we have never truly left nature)”에 근거한다는 그의 태도와도 공명한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이 아주 특별하다고 할 수는 없다. 이는 손희민을 포함해 우리가 지금까지 환기했던 거의 모든 작업들이 공유하는 일종의 당대적 공리(contemporary axiom)에 가깝기 때문이다. 소장 기술철학자인 육 후이는 이를 다음과 같이 업데이트한다.
우리가 오늘날 목도하고 있는 것은 유기체화된 비유기체적인 것으로부터 비유기체 적인 것을 유기체화/조직화하는 것으로의 이행이다. 이는 기계들이 더이상 단순한 수단이나 도구가 아니라 우리가 그 안에서 살아가는 거대한 유기체들이라는 것을 뜻한다. [9]
무엇보다 아니카 이가 자신의 이 작업을 “진정으로 살아있는 화석(truly liviging fossils)”으로 규정한다는 사실을 강조해야만 한다. 이를 통해 우리가 거친 다소 긴 우회로는 손희민이 변주해온 ‘화석’이 당대의 가장 일상적인 포맷 중 하나라 할 ‘오디오비주얼 이미지’, 즉 동영상과 사운드의 특성을 철저히 배제한다는 단순하면서도 근원적인 사실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것은 가장 고전적인 의미의 ‘정물화(nature morte)’, 즉 ‘죽은 자연(dead nature)’인 것이다.
4. 이러한 특성은 2010년 뉴욕을 기반으로 결성된 컬렉티브인 DIS의 최근 오디오비주얼 이미지 작업 중 하나인 <Everything but the World>(2021)의 핵심 질문이 “어떻게 화석이 될 것인가? (How to become a fossil?)”라는 사실을 통해 더욱 이질적인 것으로 드러난다.
팟캐스트와 고전적 다큐멘터리, 유튜브 튜토리얼과 쇼츠, TV 쇼와 애니메이션을 아우르는 다양한 형식과, 정사각형에서 와이드스크린, 아이폰 세로 화면비를 넘나드는 현란한 포맷의 변주 끝에 등장인물 중 하나는 일종의 화석으로 변한다. 사실 ‘이떻게 화석이 될 것인가? (How to become a fossil?)’라는 질문은 2022년 오스트리아에서 열린 DIS 전시의 제목이기도 했는데, 이는 아니카 이와 손희민, DIS를 따로 또 같이 가로지르는 ‘화석’의 동시대적 출현이 갖는 위상과 함의를 보다 선명하게 포착할 수 있게 해준다.
<Everything but the World>에서 ‘어떻게 화석이 될 것인가?’라 묻고 마지막에 화석이 되는 인물은 리지 피치(Lizzie Fitch)인데, 그녀는 <뉴욕타임즈> 지의 미술비평가 피터 슈젤달이 “1980년대 이후 등장한 가장 영향력 있는 아티스트”로 지목하고[10], 큐레이터 마시밀리아노 지오니가 “문화적 분수령과 같았다”[11]고 고백했던 작가 라이언 트레이카틴(Ryan Trecartin)과 20여년간 일련의 요란한 오디오비주얼 작업을 만들어온 둘도 없는 동료다. 미국의 저명한 미술사가이자 비평가인 클레어 비숍은 <K-코리아 주식회사 K-Corea INC.K [Section A]>(2009) 같은 작업이 웅변하는 이들 특유의 “정신없는, 뒤죽박죽 상태의 스크립트”를 환기하면서, 그것이 “끝없이 처분 가능하며 신속하게 바뀌는 버추얼 시대의 일회용품들(ephemera)과 그것이 우리의 관계, 이미지, 커뮤니케이션 소비에 미치는 영향”을 시사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12]. 여기서 내가 주목하는 건 “신속하게 바뀌는 일회용품들(rapidly mutable ephemera)”에 대한 환기다. 이는 그것이 최근 이 둘이 지난 20여년 간 변주해온 작업의 중핵을 설명한 방식과 그 중핵에서 공명하기 때문이다. 지난 10월 <뉴욕타임즈> 지와 가진 인터뷰 말미에서 트레카틴은 자신과 피치의 철학을 “이것이 어떻게 변[이]하는지 보고, 변이를 위한 문을 열어두는 것(let’s see how this mutates, and keep the door open for mutation)”고 말했는데[13], 이는 비숍이 적절히 포착한 “신속하게 변[이]하는 일회용품들(rapidly mutable ephemera)”의 특성과 정확하게 맞물린다.
이러한 특성과 논의가 화석과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10여년 전 DIS를 소개하는 글에서 한 비평가는 그들 작업의 핵심 논리를 ‘가속주의(accelerationism)’에 비교한 바 있다. 주지하듯이 가속주의란 “자본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본을 통한 것”, 즉 자본주의 자체의 자멸 경향을 가속화하는 것이라는 역설적인 태도에 응축되어 있는데, 이는 DIS가 초기 전시중 하나인 “DISown”를 “소매점으로 가장한 미술 전시(”an “art exhibition posing as a retail store”)로 홍보했다는 사실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가속주의의 맹아를 포착했던 선구적 인물 중 하나인 발터 벤야민은 인간의 역사를 일종의 ‘자연사(Naturgeschichte/Natural History)’로 파악한다. 이는 우리가 서두에 환기한 삶과 형식, 생명과 물질의 이항대립과 다르지 않게, 자연사(Natural History)와 인간사(Human History)는 철저히 분리된 것이라는 관습적인 이해를 의문시하는 시각이다. 최근 역사가인 차크라바르티가 지적했듯이 “정당하게 역사라고 불리는 모든 역사는 인간사의 역사”일[14] 뿐이라 단언하며 자연사와 인간사를 철저히 구분하려 했던 고전적 역사가 콜링우드(R. G. Collingwood)처럼, 인간 없는 자연을 가차 없이 기각하는 이들에게는 가령 “어떠한 바위도 그 자체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바위가 그것을 생각하는 인간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관심과 언어를 떠나서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왜냐하면 ‘존재한다’는 것은 인간의 관심과 목적의 맥락 안에서만 의미를 지니는 인간적 개념이기 때문이다.”[15] 모든 것을 인간과의 상관관계(correlation) 속에서만 생각한다는 의미에서 프랑스 철학자 메이야수(Quentin Meillassoux)가 “상관주의(correlationism)”라 비판한 이러한 인간중심적 이해 방식은[16], 초기 작업에서 다뤘던 코끼리와 문어를 지나 이제 성별의 유무는 물론 유기체와 비유기체의 구분 자체를 실질적으로 무화시키는 손희민의 화석들과 거의 무관하다.
벤야민의 ‘자연사’ 개념은 이러한 ‘비인간주의’ 또는 ‘신유물론’과 공명하면서도, 또 다른 차원에서 손희민의 화석이 갖는 위상을 역사화한다. 가령 대규모의 진열과 이윤획득을 가속화한 현대식 백화점의 등장으로 인해 순식간에 폐허로 변한 19세기의 아케이드를 거니는 소비자를 “유럽 최후의 공룡”에 비유했던 것이 대표적이다.[17] 또는 “중신세(中新世)나 시신세(始新世)의 바위들에 해당 지질학적 시대들의 거대한 괴물들의 흔적을 간직한 장소들이 있듯이, 오늘날 파사주는 멸종한 것으로 추정되는 원동물[Ur-Tie])의 화석을 포함하는 동굴들처럼 거대한 도시들에 자리한다”는 문장을 곱씹을 수도 있다.[18] “노화되는 아케이드들”에서 “현재의 화석화된 원(原)형식(ur-forms)”을 포착했던 벤야민이 “변증법적 이미지(dialectical image)”라 규정한 것이 바로 이것이라고 적절히 지적하면서, 수잔 벅-모스는 그것이 “고대의 이미지를 사용해 상품의 “본성(nature)” 중 역사적으로 새로운 것이 무엇인지를 규명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무엇보다 “역사에서 새로운 것만이 전-역사적인 것(pre-historic)”을 재소환한다는 벤야민 특유의 통찰은 왜 DIS의 작업이 화석과 자본주의를 연동시키는지, 그리고 이것이 손희민의 화석 작업이 갖는 함의가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어떤 의미에서? 가속화 논리에 따르면 가장 새로운 상품이 그 어느 것보다 빨리 화석화된다는 의미에서. 인류의 절멸을 가속화하는 기후위기조차 이윤을 위해 묵인하는 자본주의의 가속화 논리 끝에 남는 것은 ‘세상을 제외한 모든 것(Everything but the World)’일지 모른다는 미래완료시제의 의미에서.
5. 이제 손희민이 전시장에 비치한 다음의 작가 노트를 읽을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이는 작품을 작가 내면의 투사나 심리의 표현으로 환원하려는 관객들의 익숙한 습관을 강화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매우 조심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위험을 염두에 두고, 다소 길지만 전문을 인용해보자.
가끔 차가운 밤이 찾아 온다. 죽음이 살갗을 쓸어내리는 느낌이 든다. 그럴 때면 이 밤만 지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살아있다는 건 의심해 볼 만하다. 찰나인데 너무 귀해서 저릿한 생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다가오지 않은 사라짐이 내 숨에 붙어있고 겪지 않은 상실이 나를 찌르고 지나간다. 사체와 화석. 덩어리와 표 피 갈아내고 붙여가는 행위. 무언가를 만들고 애도한다. 죽어있는 것만을 나는 만 질 수 있었다. 내가 존재할 수 없던 시간이 쌓인 어느 생의 흔적을 탐한다. 쓰린 밤을 겪을 때면 누군가의 품에 안겨있기를 바란다. 모든 것이 괜찮다고 등을 토닥 이며 나를 안아주는 존재를 상상한다. 그래서 나는 화석을 남긴다. 내 작은 생의 사투를 누군가 발굴해주기를 바라면서 짓눌리고 파묻힌 내 작은 이야기가 언젠가 보듬어지길 바라면서. 나의 죽음은 내가 알지 못한다. 주름진 것들은 화석이 되어 또 다른 생명이 된다. 살기 위해 화려해진 깃털은 염원을 담아 홀로 빛난다. 그리 고 씨앗은 지구의 모든 걸 뒤섞어 작은 매개에 담는다. 나는 그것을 매만지며 찰나 의 생을 이어가고 있다.
여기서 작동하는 정동을 ‘선제 애도(preemptive mourning)’라 부르면 어떨까? “다가오지 않은 사라짐이 내 숨에 붙어있고 겪지 않은 상실이 나를 찌르고 지나간다”는 작가의 감각이, 현재 생생하게 살아있는 자신을 포함한 지구상의 생명체 전부를 잠재적인 “사체와 화석”으로 앞서서, 미리 지각한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이는 DIS의 ‘가속주의’적 입장과 공명하는 듯 싶지만, 그들이 고심하는 자본주의 체제조차 손희민은 이미 추월, 혹은 초월해 있다. 이에 대한 판단은 논쟁을 부를 수 있고, 위의 글에서 스쳐가는 음울함과 비관의 정조 역시 이런 의미에서 놀랍지 않지만, 손희민은 이조차 말 그대로 ‘스쳐 지나간다.’ 이전의 작가 노트나 나와 나눈 대화에서 덤덤하게 환기하곤 했던 그의 입장, 즉 ‘인류의 절멸 이후에도 생명이 가능하다’는 입장으로 이어진다는 의미에서. 여기서 “주름진 것들은 화석이 되어 또 다른 생명이 된다.”
사실 이는 그가 지속적으로 곱씹어온 생태주의 사상가인 린 마굴리스의 입장이기도 하다. “지구의 방탕한 종이 그 자원을 탕진하면서...우리의 창조적 파괴 행위도 속도를 올”리지만, 마굴리스에게 “자연은 끝나지 않으며, 지구가 구조를 요청하지도 않는다.” 궁극적으로 “인류는 생명 교향곡의 지휘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있든 없든 생명은 계속될 것이다.”[19] 흥미롭게도 이는 마굴리스 자신은 물론,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헤켈의 다음과 같은 입장을 재소환한다.
인류란 영원한 실체의 진화에서 이행하는 한 단계일 뿐이며, 물질과 에너지의 한 특정한 현상[적] 형식으로서, 그것의 진정한 비율은 그것을 무한한 공간과 영원한 시간의 배경에 놓았을 때 곧 지각할 수 있게 된다.[20]
움직임 없는 손희민의 고요한 화석들은 이런 근원적이고도 급진적인 의미에서 ‘죽은 자연(nature morte)’임과 동시에 그 너머를 환기하는 것이다. 마굴리스가 세공한 헤켈의 ‘생명형식(Lebensform)’의 철학은,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아니카 이의 사례처럼 후자가 그린 방산충 이미지를 씨앗으로 삼아 21세기에 잔존(survive)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손희민의 화석과 따로 또 같이, 당대 프랑스의 건축가이자 디자이너인 르네 비네(Rene Binet, 1866-1911)가 1900년에 만든 파리 만국 박람회의 출입구를 그 오랜 전사(prehistory)의 화석으로 소환하는 것이기도 하다. 헤켈의 방산충 그림들은 아라베스크풍의 아르누보 양식 영향을 받았지만, 동시에 독일의 아르누보인 유겐트슈틸(Jugendstil)에 되먹임되었다는 양가적인 의미에서 말이다.[21]
이런 포괄적인 계보 속에서 읽을 때에만, 손희민의 화석이 갖는 위상은 보다 선명히 포착된다. ‘당대의 감각을 유물로 만드는 존재'라는 시각으로 예술가를 파악하고, 현재, 혹은 미래를 곧 '도래할 과거'와의 연장선에서 고려하는 손희민의 시각은 21세기의 기후 및 생태위기의 산물임에 틀림 없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살펴본 다른 동시대 작가들의 작업과 더불어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선행했던 어떤 선사를 변주하는 것이기도 하다. ‘인류 이후에도 생명은 가능하다’는 손희민의 입장은, 자신의 이후 작업에도 적용될 수 있을까? 그의 미래는 어떤 과거와 미래를 소환하고 또 추월하게 될까? 손희민의 <Scenario>가 시사하는 궁극의 시나리오란 어쩌면 이 질문들 속에 내포되어 있을 것이다.
[1] Yung Bin Kwak, Art Critic/Art Media Scholar, Graduate School of Communication Arts, Yonsei University, Visiting Professor
[2] Stefan Helmreich and Sophia Roosth, “Life Forms: A Keyword Entry,” Representations 112, no. 1 (2010), 27-53.
[3] Georges Canguilhem, The Knowledge of Life, trans. Stefanos Geroulanos and Daniela Ginsburg, New York: Fordham University Press, 2008, 66; 조르주 캉길렘, 『생명에 대한 인식』, 여인석, 박찬웅 옮김, 서울: 그린비, 2020, 138.
[4] “Once one recognizes the originality of life, one must "comprehend" matter within life, and the science of matter-which is science itself-within the activity of the living.” Ibid. 146; 위의 책, 70.
[5] 2년 전 스위스에서 이 둘을 병치시킨 전시가 열렸던 것은 이런 의미에서 놀랍지 않다.
https://www.schinkelpavillon.de/exhibition/h-r-giger-mire-lee
[6] 이는 ‘There Exists Another Evolution, But In This One’라는 영문제목의 번역인데, “이에는”이라고 번역된 후자가 “another evolution”과 구분되는 ‘기존의 진화(extant evolution)’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매우 아쉬울 수 밖에 없다.
[7] Jane Bennett, Vibrant Matter: A Political Ecology of Things,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2010; 제인 베넷, 『생동하는 물질: 사물에 대한 정치생태학』, 문성재 옮김, 현실문화, 2020.
[8] 아니카 이 스튜디오의 2023년 3월 17일자 인스타그램 포스팅.
https://www.instagram.com/anickayi_studio/p/Cp3d5lwv3zq/
[9] What we are witnessing today is a shift from the organized inorganic to the organizing inorganic, meaning that machines are no longer simply tools or instruments but rather gigantic organisms in which we live.” Yuk Hui, Recursivity and Contingency, New York: Rowman & Littlefield, 2019, p.28. 강조는 인용자. 물론 보다 엄격히 말하면, 육 후이의 이러한 정식화는 그가 영국에서 사사한 철학자 베르나르 스티글레르의 독해를 세공해 확장한 것에 가깝다. Bernard Stiegler, “Leroi-Gourhan: l'inorganique organisé”, Les cahiers de médiologie, vol. 6, no. 2, 1998, pp. 187-194.
[10] Calvin Tomkins, “Experimental People,” New Yorker, Mar. 24, 2014.
https://www.newyorker.com/magazine/2014/03/24/experimental-people
[11] Olivia Laing, “The Future of Loliness,” Guardian Apr. 1, 2015.
https://www.theguardian.com/society/2015/apr/01/future-of-loneliness-internet-isolation
[12] the endlessly disposable, radiply mutable ephemera of the virutal age and its impact on our comsumption of relationships, images, and communication...the troubling oscillation between intimacy and distance.”Claire Bishop, “Digital Divide: Contemporary Art and New Media,” in Mass Effect: Art and the Internet in the Twenty-First Century. edited by Lauren Cornell, Ed Halter, MIT Press, 2015, pp. 337-338. “변이(mutation)”에 대한 강조는 나의 것이다.
[13] John Chiaverina, “Why the Pre-eminent Artists of Internet Culture Escaped to Rural Ohio,” New York Times, Oct. 1, 2024.
https://www.nytimes.com/2024/10/01/t-magazine/ryan-trecartin-lizzie-fitch-ohio.html
[14] “[A]ll history properly so-called is the history of human affairs.” R. G. Collingwood, The Idea of History, 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1946/1976, p. 212. Dipesh Chakrabarty, The Climate of History in a Planetary Age, Chicago: IL, 2021, 27; 디페시 차크라바르티, 『행성시대 역사의 기후』, 이신철 옮김, 서울: 에코 리브르, 2023, 50에서 재인용.
[15] David D. Roberts, Benedetto Croce and the Uses of Historicism,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7, 62; Chakrabarty, The Climate of History, p. 28; 차크라바르티, 『행성시대 역사의 기후』, 51쪽에서 재인용.
[16] Quentin Meillassoux, Après la finitude. Essai sur la nécessité de la contingence, Paris, Seuil, 2006; Quentin Meillassoux, After Finitude: An Essay on the Necessity of Contingency, trans. Ray Brassier. London and New York: Continuum, 2008; 퀑탱 메이야수, 『유한성 이후: 우연성의 필연성에 관한 시론』, 정지은 옮김, 도서출판 b, 2010.
[17] Susan Buck-Morss, The Dialectics of Seeing: Walter Benjamin and the Arcades Project, Cambridge, MA: MIT Press, 1989, p.65.
[18] 위의 책.
[19] “The planet's prodigal species now expends these reserves...[and] our creative destruction accelerates. But nature has not ended, nor does the planet require saving.” “Humankind does not conduct the sentient symphony: with or without us, life will go on.“ What is Life?, 242, 243. 『생명이란 무엇인가?』, 326, 327.
[20] “Humanity is but a transitory phase of evolution of an eternal substance, a particular phenomenal form of matter and energy, the true proportion of which we soon perceive when we set it on the background of infinite space and eternal time.” Lynn Margulis and Dorian Sagan, What is Life?, 44. 번역 수정. 마굴리스와 세이건은 알프레드 월러스의 책에서 헤켈의 문장을 인용하고 있지만 양자 모두 원출처는 밝히지 않는데, 이는 헤켈의 베스트 셀러인 『우주의 수수께끼 The Riddle of the Universe』에서 가져온 것이다. Ernst Haeckel, The Riddle of the Universe, trans. Joseph McCabe, Harper & Brothers, 1905, 244.
[21] Philp Ball, Shapes: Nature’s Patterns- A Tapestry in Three Parts, Oxford: Oxford Univeristy Press, 2009, 37-39; 필립 볼, 『모양: 무질서가 스스로 만드는 규칙』, 조민웅 옮김, 사이언스 북스, 2014, 65-67. cf. 에른스트 헤켈, 『자연의 예술적 형상 Kunstformen der Natur』, 엄양선 옮김, 이정모 해설, 그림씨,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