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KS
미술평론가 Art Critic
Sculptural Imagination
Cheongju Art Studio
Printed Cataloge Available
바다
네번째 개인전 《보이지 않는 생물》에서, 손희민은 생물과 바다 관련 서적 18권을 별도의 윈도우 갤러리에서 전시했다. 눈에 띄는 것은 『바다 인류』, 『바다의 철학』, 『우리를 둘러싼 바다』 등 인간과 바다의 관계를 조명하는 해양 관련 책의 표제였다. 책을 펼쳐 놓은 테이블에는 바다에서 채집한 돌, 조개껍질, 나무 같은 것들이 군데군데 놓였는데, 긴 시간 바다 환경 속에서 만들어진 제각각의 표면이 도드라져 보였다. 바다에 관한 관심을 집중적으로 드러낸 전시는 지난 개인전 《HMS Challenger》(2023, 보안여관)였으며, 위의 레퍼런스들은 이 전시에서 “바다와 그 곳에 사는 생명체를 연구”하는 ‘해양학(Oceanography)’에 관한 접근을 도왔다. 전시장에 따로 비치해 놓은 신문 형식의 책자에는 참고문헌에서 발췌한 인용문들과 작가 노트 및 사진 자료들이 “바다”라는 유동적인 장소를 통한 그의 조각적 상상력을 어느 정도 가늠하게 했다.
손희민은 시각 경험의 예외적인 장소로 심해(深海) 세계에 대한 시각적 접근 불가능성에 초점을 맞췄다. 바다는 삼차원 현실 공간의 연장이자, 오래된 과거의 원형을 간직한 기억의 장소이면서, 미래로의 끝없는 이동/유동을 열망하는 상상의 장소이다. 그것은 마치 양수로 가득 찬 모체의 자궁처럼 어떤 원형을 품는 일종의 (텅 빈) 몰드 같은 것이기도 하다. 손희민은 이러한 비약적인 연결점을 찾아, 서로 떨어져 있는 시간대를 접붙일 수 있는 “바다의 시간”을 추적한다. 그것은 또한 “조각의 시간”과도 연결된다.
해양 미소 동물의 “키틴질”은 여러 정황을 매개하는 중요한 단서라 할 수 있다. 생물의 표면을 이루는 물질의 “유전적 복제”에 주목하여, 그의 말대로 “자연이 만들어낸 조각적인 성질”을 해양 미소 동물의 생태적 조건 속에서 상상하고 파악하는 일련의 과정을 지내왔다. “곤충류나 갑각류의 외골격을 이루고 있는 물질”[*네이버 지식백과 두산백과 참고]로 정의되는 키틴질에 대해 알게 된 손희민은, 갑각류인 게와 게의 유생(幼生) 사이에 개체 발생의 과정을 통하여 상이한 형태로의 변화 과정과 함께 최종적인 성체에 이르는 외골격의 “완성”에 주목했던 모양이다. 갑각류의 유생 ‘조에아(Zoea)’에서 시작해 ‘메갈로파(Megalopa)’ 단계로의 탈피를 거쳐 일련의 개체 발생적 변이 과정을 온전히 겪어낸 성체로서 게의 외골격을 비로소 얻게 되는 수수께끼 같은 시간을 증명하면서 말이다.
이처럼 손희민이 유독 해양 미소 생물에 주목함으로써 “바다”에 관한 탐구를 확장해 나가는 최근의 정황에서, 나는 그가 이 바다 생명체의 “변신”을 보고 조각적 형태 안에 함의되어 있는 내밀한 시간들과 더불어 그것을 (인간) 형상의 근원적인 경험과 나란히 놓고 망상했을 지 모른다는 의심을 해본다. 그가 ‘진화적 조각’이라 이름 붙인 입체 시리즈는 단단한 성체가 되기 이전, 아직 제 형태가 나타나기 이전의 투명한 “물질” 상태에서 점차 뚜렷한 “윤곽”과 “표면”을 지닌 성체로 변이하는 과정을 환기시킨다. 이는 소조건, 조각이건, 어떤 물질로서의 재료를 붙이거나 깎는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삼차원의 형태를 평평한 바닥에 일으켜 세울 수 있는 고전적인 조각의 원리와 닮아 있다. 그리고 그것은 조각가가 자신의 신체 앞에서 마주하게 되는, 즉 자신의 시선이 반영된, 대상에 대한 지각 혹은 인식으로 이어진다. 이때, 바다는 다시 “매체로서의 조각”을 넘어선 “조각적 인식”의 차원에서 인간 형상의 원형을 기억/기념하고 있는 시공간으로서, 작은 세포 정도가 자리할 만큼 미시적인 공간이자 충돌과 결합과 분열이 반복되면서 미지의 형상을 탄생시키는 거시적인 우주 공간에 견줄 만하다.
캐스팅
손희민의 작업에서 캐스팅을 통한 복제의 과정은 중요한 위상을 갖는다. 캐스팅은 하나의 틀[주형]에서 동일한 형태를 복제해 내는 조각의 기법으로, 이는 단순히 복제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주물 재료에 따라 그 형질을 더욱 강화시키거나 변형시킬 수 있는 것도 중요한 요소다. 대개 소조로 제작한 원형을 번거로운 절차에도 불구하고 주물 뜨는 이유는 무른 재료로 표현한 형태를 석고나 청동으로 옮겨 삼차원의 시공간 속에서 중력을 거슬러 더 잘 견디는 힘을 갖게 하기 위함도 있다. 손희민은 앞서 언급한 갑각류 성체의 키틴질이 그러한 조각적 물질의 변형 혹은 진화 개념과 맞닿아 있다고 상상했을 테고, 초기 작업 ‘키틴’ 시리즈에서 복합적인 맥락을 아우르며 캐스팅을 통한 복제의 방법론을 탐구한 바 있다. 예컨대, 죽은 게 껍질에 버섯을 키운다든가, 점성이 있는 반투명 실리콘으로 탈피한 것 같은 개구리 허물을 복제한다든가, 갑오징어 뼈를 흰 색 우레탄 레진으로 단단하게 캐스팅한 작업이 ‘키틴’ 시리즈에 포함된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가 조각의 기법으로서 “캐스팅”의 방법을 그대로 습득하여 어떤 형태를 원형으로부터 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활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손희민은 갑각류의 껍질을 하나의 텅 빈 몰드처럼 가져와 버섯균이 제 유전적 형태를 스스로 모방하며 자라날 수 있게 하는 지지체로 인식했다. 또한 복제의 대상이 생물학적으로 갖고 있는 피부의 점액질 느낌을 실리콘의 물성을 통해 모방함으로써, 탈피한 실체처럼 눈 앞에 현존하는 형태를 갖는가 하면 동시에 벗겨진 껍질[몰드] 안에서 빠져나간 또 다른 원형의 복제물[주물]의 관계를 상상하게 한다. 반대로, 레진으로 복제한 갑오징어 뼈 더미는 한 개체의 “해부학적 내부”로서 그것의 표면과 절대적인 관계를 가져왔던 조각적 사고를 전복시키면서 되레 “내부”와 “외형”의 비상관적 관계를 강조한다.
최근 손희민의 작업은 “화석”을 둘러싼 조각적 접근의 경로를 찾는 것처럼 보인다. 지난 해 개인전 《HMS Challenger》에서 해양 미소 동물에 대한 조사와 연구는 바다 고생물로 이어져 그 현존의 흔적(들)이 축적된 화석에서 “조각의 시간”을 엿볼 수 있었다. 파괴된 고대 조각의 발굴과 그것의 복원, 오랜 시간에 걸쳐 퇴적과 침식과 융기 등의 물리적 힘의 작용에 의해 지층에 단단하게 남겨진 생명체의 파편들과 그것의 가설, 두 사건 사이의 닮음과 다름을 이리저리 조율하면서, 손희민은 상이한 시공간의 결합을 현존하게 하는 조각의 시간을 환기시킨다.
스케일
《보이지 않는 생물》에 이르면, 또 하나 조각에 관한 화두로 “스케일”의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사실 손희민은 전시를 준비하면서 신체를 압도하는 거대한 크기의 ‘마이크로 미생물’ 연작을 제작해 볼 계획이었다. 여러 이유에서 계획은 수정되었으나, 마치 생물학자들이 현미경을 들여다 보고 육안을 볼 수 없는 미생물의 섬세한 형태를 드로잉 하듯 정확한 윤곽과 표면을 가진 삼차원의 조각적 형태로 유사 과학적 형태를 제작했다. 수족관에 개별적으로 배치한 이 “모형”들은 미세한 생물들과 생태계를 이루며 거시적인 세계[시각]와 미시적인 세계[시]를 동반한 삼차원적 실체에 대한 경험을 극대화 한다.
조각에 있어서 “스케일”은 중요한 문제다. 단지 물리적인 크기뿐만 아니라, 그것이 보는 이의 시각을 어떻게 작용시키는가와 자신을 둘러싼 공간 및 환경과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가의 문제에서 시지각적 “거리”를 환기시킨다. 그것은 또한 조각적 인식으로 확장돼, 실제 같은 시공간에 현존하지 않은 대상과의 관계, 즉 유전적인 관계 및 주형과 주물의 관계 등을 사고하는 비가시적 시공간을 아우른다.
2020년부터 이어진 손희민의 작업은 여러 서사적 참조들을 재구성하여 조각적 개념을 새롭게 환기시켜왔다. 한동안 그는 주제적인 측면에 집중하여 참조의 대상을 연구하고 탐구하는데 긴 시간과 노력을 할애했다면, 초기 작업의 문제의식으로 돌아가 “생물” 혹은 “자연”의 현상과 “물질”에서 “형태”로의 삼차원적 전환이 발생하는 조각적 과정들을 재구성하는 시도를 통해 스스로의 물음에 대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